Chapter 21

게 아니라, 이런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을 이해한다는 것은 오늘날도 불신자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물며 예수님 당시에 시골의 젊은 목수가 지닌 신성을 알아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열성적인 제자들이 윗저고리를 벗어서 예수가 걸어가는 길에 펴고, “주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여!” 하고 야단법석을 떠니, 바리새인들은 보다 못해 주님에게, “선생님, 거 당신의 제자들은 제정신이 아니군요. 남 보기에 덕스럽지 못하니 저들을 좀 제지하시오.”(눅19:39)하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입에서 나온 ‘선생님’이라는 말에 유의해야겠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도저히 선생님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예수를 신격화(神格化)하는 무리가 있으니 실로 한심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를 신격화한 것이 올바른 평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서는 이들만이 당신의 사람이요, 그밖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군식구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내가 어떤 관련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며, 관련이 없는 사이라면 하나님의 섭리는 나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에게는 물론이고,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마귀입니다.(마4:1 이하 참조)

214 에덴의 메아리6권
Chapter 21

오늘날 이 땅에는 크신 하나님의 섭리가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 가운데 복음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저마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즉 이러저러하고 여차저차해서 따를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인들은 자기의 판단이 옳은 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길 때에도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길 예비자로 와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세례를 줄 때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면 일단 자기 사명을 마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제넘게 주님이 하시는 일에 신경을 쓰다가 자기 제자들의 말만 듣고 끝내는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에 관한 것은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며, 자기가 나설 처지가 못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이런 자기 분수를 알았던들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의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됩니다. 한 샘에서 어떻게 동시에 단 물과 쓴 물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이것을 혼동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죽어도 저버리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고 간사한 것입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다짐을 받을 만도 합니다.

에덴의 메아리6권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