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바라는 궁극적인 행복은 육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를 우리 안에 영접할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끼니가 떨어져도 그만, 병들어 죽게 되어도 그만, 마음은 무사태평합니다. 왜? 굳게 의지하는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어련히 알아서 도와주시랴 하고 내어 맡기게 됩니다. 이 경우에 주께서 사실상 어느 모로나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큰 은혜의 사슬에 매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은혜가 떠나 냉랭하게 되면 그보다 더 답답하고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제일 불행한 것은 은혜를 놓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 정성을 다하여 당신을 공경하고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전력 투구의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거기 설사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이를 너그럽게 용납하지만, 적당히 믿을 때 하나님은 섭섭히 여기시는 것입니다.(계3:15)

하나님은 구약 시대와는 달리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예컨대 초상집에 가서 송장을 만지다가 예배 보러 허겁지겁 뛰어와도 하나님은 오히려 기특하게 보시지만, 구약 시대라면 어림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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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0

그런 사람은 성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을 통하여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인간의 혼을 다스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 시대에는 육적인 것을 도외시해도 좋으냐하면,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 육 아울러 하나님 앞에 정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교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는 지금 찬송과 기도와 말씀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허술한 옷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교회에 나와,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뒤편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나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어른을 만나러 갈 때에는 깨끗이 세수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가서 그 분 앞에서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가는 사람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행자지(自行自止)하기 쉬운데,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천사를 통하여 여러분의 동태를 살피고 계시는 것입니다.(슥1:12 참고)

우리가 신령한 것을 알아들으려면 신령한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설교를 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바울은 성경에 정통하여 설교할 때 유식한 말을 많이 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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