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은 그렇게 말할 만도 합니다. 배운 것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내가 만일 저들의 위치에 있다면 어떠했을까?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언동을 취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럴 공산이 큽니다. 왜?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슥14:8)는 성경 말씀이 바로 오늘날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나도 주께서 가르쳐 주시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내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환히 알고 있는 것은 이처럼 주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무슨 수로 성경을 그렇게 깊이 알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그야 물론 공부하면 공부 안 한 것보다야 나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 66권을 천 번쯤 읽으면 구절들을 입으로 줄줄 외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뜻을 모르는 구절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이렇게 성경의 장절에 밝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의 알맹이, 즉 그 큰 줄기(大脈)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줄기를 알면 가지는 저절로 알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핵심을 아는 것은 자기 머리로는 안 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내가 성경에 밝은 것은 요컨대 성경 기자인 선지자나 사도들과 영적으로 동창생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도 성경을 잘 압니다. 성경에 가려 놓은 대목이 많은 것은 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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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성경에 가려진 이런 여호와의 비밀은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것도 영을 분별하는 척도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감춰진 여호와의 비밀의 말씀을 드러내느냐, 아니면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에게만 유리하게 풀이하느냐에 따라 성령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자신을 들어 쓰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3:9)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큰 종은 계시로 이 비밀을 알게 하여(엡3;3)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전하는 한편 이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부어주었습니다.(행19:6) 그러나 사도시대의 안수는 이미 다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는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2천 년 전에 죽은 바울을 여기 불러다가 안수를 받을 겁니까? 안 될 말입니다.

그럼 말씀은 어떠합니까? 바울이 객지의 움막이나 옥중에서 각처의 교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는 그대로 기독교의 신학이 되어 우리에게 훌륭한 영의 양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달리,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할 문자 그대로의 마지막 때에는 바울의 말씀만으로는 미흡한 데가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새로운 신학을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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