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

31. 순교에 대하여

기독교 역사를 보면 피비린내를 많이 풍기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도들을 사자(獅子)의 밥이 되게 한 유명한 네로 황제의 대학살에서 우리나라 6.25때 교역자들에 대한 붉은 마수(魔手)의 무더기 처형에 이르기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믿음의 형제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무참히 쓰러져 갔습니다. 아니, 오늘 이 시간에도 저 공산 치하에서는 지하에서 몰래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지내는 많은 신도들이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후 근 2천 년 동안에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수는 수백만에 이르는데, 이들을 다 순교자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다 순교자라면 주께서 재림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14만 4천의 천군은 진작 차고 넘쳐 천년왕국이 벌써 이루어지고, 이어서 새 하늘나라가 임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순교자를 가리켜 ‘주를 위해 목 베임을 받은 자’(계20:4)라고 했습니다마는, 이 말씀은 주를 위한 겉사람의 형식적인 죽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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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1

아니라 속사람의 진실된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 아무런 미련이나 두려움 없이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진 사람이라야 비로소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한 세대에 몇 사람이 날까말까 한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육을 가진 인간으로서 주를 위해 태연히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설사 구원을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 권력, 재산, 이 모든 것과의 작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것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를 앙모하는 마음이 여간 뜨겁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믿음은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되며 결코 인간의 용기나 결심 같은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자기를 의식하지 않아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대체로 한동안 같이할 뿐,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성령이 자기에게 충만히 임할 때 비로소 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순교하려는 각오는 되어 있어도 죽음을 눈앞에 놓고 애착이나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는 아직 성령을 충만하게 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그 죽음은 거룩한 순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순교란 성령의 감화도 감화지만, 긴 시일을 두고 미리 이에 대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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