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어떤 저명한 인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즐겁게 살려면 이발을 하고, 한 주일을 즐겁게 살려면 양복을 맞춰 입고, 한 달을 즐겁게 살려면 말을 사고, 1년을 즐겁게 살려면 집을 장만하고, 일생을 즐겁게 살려면 정직해야 한다.” 이것은 정직, 곧 인간의 덕을 강조한 것으로,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이 덕은 자기가 중심입니다. 즉 자기라는 인간 본위의 덕입니다. 그러므로 이 덕은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 가운데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덕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리를 판단할 때, 으레 ‘양심’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양심도 상당히 변덕이 심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양심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을 푯대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것에 그치는 양심에 의지할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중할 수 없게 됩니다. 양심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선과 악의 개념(槪念)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또 악이겠습니까? 여기서도 우리는 주님 위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어떤 행위가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합당치 못하냐에 따라 선과 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 본위로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듣고, 또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눅7:25) 이것은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답답함이 담긴 논평의 한 토막입니다. 즉 “너희가 왜 인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