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

영국의 어떤 저명한 인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즐겁게 살려면 이발을 하고, 한 주일을 즐겁게 살려면 양복을 맞춰 입고, 한 달을 즐겁게 살려면 말을 사고, 1년을 즐겁게 살려면 집을 장만하고, 일생을 즐겁게 살려면 정직해야 한다.” 이것은 정직, 곧 인간의 덕을 강조한 것으로,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이 덕은 자기가 중심입니다. 즉 자기라는 인간 본위의 덕입니다. 그러므로 이 덕은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 가운데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덕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리를 판단할 때, 으레 ‘양심’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양심도 상당히 변덕이 심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양심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을 푯대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것에 그치는 양심에 의지할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중할 수 없게 됩니다. 양심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선과 악의 개념(槪念)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또 악이겠습니까? 여기서도 우리는 주님 위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어떤 행위가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합당치 못하냐에 따라 선과 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 본위로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듣고, 또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눅7:25) 이것은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답답함이 담긴 논평의 한 토막입니다. 즉 “너희가 왜 인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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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보고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하느냐?” 하는 주님의 탄식 섞인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은 인간 이영수를 보려고 여기 모였습니까? 나를 보지 말고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보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의 말 한 마디에 쓰러진 것이 어디 베드로가 한 일입니까?(행5:1-6 참조)

주의 종은 날이 갈수록 존재가 희미해지고 대신 주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반대이면, 그러니까 점점 주님이 희미해지고 내가 드러나면 이건 큰일입니다. 인간 이영수는 사라져야 합니다. 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신구약 66권에 기라성처럼 등장한 많은 선지자들의 인품을 보십시오. 성경은 여느 경전들과 달리 이들의 약점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도학자(道學者)나 식자(識者)들의 빈축을 사기도 합니다. 이들이 모처럼 교회 문을 두드렸다가 떨어져 나가는 원인이 주로 이런 데 있는 것입니다. 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결코 도덕적으로 숭배할 만한 인물이 못되며, 위대한 모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 밖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들을 통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 그러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는 약점과 결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요컨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며 덕성(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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