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14. 이것이 기독교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쟁이를 싫어합니다. 그 책임의 일부는 물론 우리에게 있습니다. 즉 우리가 부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쟁이가 더 고약하다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에게 죄송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바울도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롬15:2)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쟁이가 더 고약하다.”는 이 말은 한편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뭔고 하니, 이 말은 기독교를 수도의 한 방편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수도를 중요시하지만, 거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원죄와 유전죄 및 자범죄에 매인 인간이 그 죄를 주의 피로 씻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종지부를 찍고 눈물과 한숨을 모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여 영원한 복락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소망이나 욕구치고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환상적인 꿈이 아니라, 적어도 믿을만한 이론(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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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

씀)과 체험의 터전 위에 서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실’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수도에 그친다면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노소와 우양(牛羊)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6:20-2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다음의 일이었으며,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을 여호와께 바치고,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수6:17)는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이까지 죽이고 기생 라합은 건지다니, 여호와께서 너무하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생각이고, 여호와의 뜻은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신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이 어긋나는 경우를 간혹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물론 여호와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차질이 생길까요?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의 크신 경륜과 기독교의 원리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귀히 여기시고(시116:15)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겔33:11) 하물며 죄 없는 어린아이가 죽는 것을 기뻐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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