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되는 무기가 곧 주의 ‘입의 검’이다.

그럼 ‘입의 검’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4:12) 하고 기록되어 있으며, 에베소서에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고 하였다. 그러니까 ‘입의 검’이란, 입의 말씀을 가리키며, 이 말씀, 곧 검에는 인간의 죄를 지적하여 회개시키고 인간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힘이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6)를 주고, 또한 흰 돌7)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2:17)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 말은 주께서 성경에 여러 차례 되풀이하고 있다. 또 이와 표리(表裏)가 되는 말씀으로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도 하였다. 이 말씀들은 한결같이 인간이 이성(理性)의 힘만으로는 신령한 세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 하더라도 단지 지성(知性)에만 의지하여 성경을 읽을 때 거기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요컨대 과장된 신화나 전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수박 겉핥기 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눈에 성령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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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해져야 한다. 이런 경우를 “눈이 열린다.”고 한다. 이것이 여타의 책과 성경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듣는 귀’도 마찬가지이다. 신령한 말씀을 올바로 알아들으려고 해도 역시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리 유식하고 이해력이 빨라도 신령한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다. 성령의 힘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때, “귀가 뚫렸다.”고 한다. 하긴 예술 같은 것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옳은 말이다. 피카소를 이해하려면 그만한 눈이 열려야 하고, 베토벤을 알아들으려면 역시 그만한 귀가 뚫려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령한 말씀의 경우와는 다르다. 어지간히 소양이 있으면 훈련에 의해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령한 말씀을 보고 듣는 데는 이런 소양이나 훈련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이 어떤 계기로 위에서 임하는 즉시 영의 세계를 알게 되어 있다.

다음에 이긴자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준다고 하였다. 이 감추었던 만나는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 내린 하늘의 양식으로서의 만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대로, 이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떡 먹듯이 먹고 배가 부르며 소화를 시키는 육의 양식이지만, 이 계시록의 만나는 먹는 것을 느끼기는 하는데, 배가 부르지 않고 따라서 소화도 시키는 일이 없는 영의 양식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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