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책머리에

인류 역사는 성령과 악령이 투쟁하는 과정이다. 즉 이 양자가 인간을 사이에 두고 배후에서 서로 자기편으로 이끌려고 부단히 겨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무엇보다도 신앙 체험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양자의 숨은 움직임을 혼동하거나 곡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오는 폐단은 의외로 큰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영을 분간하라고 당부하셨다.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착각이다. 또 인간은 죽어서 무슨 윤회(輪廻)의 수레바퀴 같은 도정(道程)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과학도 입증하는 바이다. 기독교에 적극 반기를 든 철학자 러셀 경도, 지금쯤 지하에서 자기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영혼 불멸’을 생리학적 입장에서 부인했지만, 이 문제를 심령과학이 앞으로 분명히 밝혀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나라에서도 양적(量的)으로 많이 팽창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령(救靈)의 소임을 제

6 에덴의 메아리2권
Prologue

대로 하지 못하고, 때로는 사회의 빈축을 사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요컨대 성령의 젖줄이 메말라, 영의 양식에 굶주린 뭇 심령들의 창자를 채워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 교계(敎界)에서도 옛날 초대교회에 내린 성령의 역사를 부러워하여 ‘성령강림제’라고 해서 이를 기념하기도 한다. 지금 이 땅에는 그보다도 더 큰 성령의 은총이 내리고 있는데―여기서도 우리는 무지가 얼마나 큰 적인가를 알 수 있다.

이 땅에서 새로 움튼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아직 요람기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좁은 길을 걸으며’ 고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 설교집은 그 부산물의 하나이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에덴의 메아리’ 제1집에서, 우리는 이 책이 여느 설교집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이 설교집을 통하여 오래 끊겼던 은혜가 다시 연결되고, 향취가 진동하는 등의 체험을 한 형제가 꽤 많았던 것이다(이것은 녹음테이프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성령의 역사에는 에누리가 없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사이비 진리(似而非 眞理)가 난무하여 옥석(玉石)을 분간할 수 없는 혼란을 빚어내고 있지만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결코 희미하거나 긴가민가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고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에는 회의(懷疑)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왜 그런가?’하는 의문도 가끔 생기게 된다. 그것은 대상이 육의 세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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