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

않지만, 그렇지 못하고 애써 마귀의 편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려고 선한 싸움을 하는 동안은 마음의 갈등과 번거로움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제일 뼈아프게 느낀 사람은 바울이 아닌가 합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하는 탄식이 그간의 소식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롬7:15-24)

하나님을 진실히 섬겨 ‘주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주가 계신 경지’에 이르면, 이런 괴로움은 따르지 않습니다. 바울도 ‘선한 싸움’을 싸운 끝에 드디어 이 경지에 이르러, “나를 본받으라.”고까지 신도들에게 권면하게 되었으며, 이때의 바울은 이미 ‘괴로운 사람’일 수 없습니다. 또한 불신자에게는 이런 괴로움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주 외면하고, 자신이 알든 모르든, 마귀의 편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언제나 마귀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술에 물을 탄 것처럼 의식(意識)상태가 희미해져, 자기가 어느 편에서 움직이는지도 분간 못하게 됩니다. 마귀는 영체로, 매우 고약하고 간계가 뛰어나 우리는 대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손아귀에 놀아나게 됩니다.

마귀는 성경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저희가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91:12)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다윗이 주님을 두고 한 노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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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5

알 수 없지만, 마귀는 이미 알아차렸으므로, 주님을 시험할 때, “성전 꼭대기에서 땅바닥에 뛰어내려 보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 아니냐?”하고 주님을 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 가운데는 마귀가 미리 알아서는 안 될 대목을 극히 애매모호한 상징으로 표현하거나, 아주 동떨어진 내용을 글 속에 살짝 삽입하여 가려 놓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이 알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런 대목은 여호와께서 일정한 기간 동안 세상에 터뜨리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시편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118:22) 즉 하찮은 돌인 듯하지만, 매우 귀한 돌이 된다는 뜻으로, 이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의미가 매우 모호하여 잘 알 수 없습니다. 또 이사야서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사8:14-15) 이 돌도 주님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주님 당대까지는 마귀의 눈을 가리기 위해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뜻을 가렸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분명히 표현하면 마귀가 미리 알고 훼방하기 때문에 지장이 많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화평도 얻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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