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책머리에

기독교란 요컨대 우리의 작은 목숨을 하나님의 큰 생명과 바꾸려는 거창한 업(業)이다. 우리는 잘만 하면 죽어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잘못 섬기는 사람을 심히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죽어도 사는 길―우리는 성경에서 이 길을 찾을 수 있고, 신앙 체험에서 이것을 입증할 수 있다.

성경의 저자는 차라리 성령―인간이 아니라―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하면 성경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이 성령의 도움으로 영계와 접할 수 있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인생은 무한히 신비롭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중심의 신비주의에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르는 튼튼한 은혜 줄기를 잡으려는 것이다.

무지는 신앙에서 더욱 금물이다. 우리는 ‘말씀’으로 서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는 줄도 모르는 형제들을 가끔 목격한다. 자기로서는 큰

6 에덴의 메아리1권
Prologue

진리 가운데 거한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말씀’에서 애써 지혜의 양식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다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불행을 스스로 불러들일 것이다.

어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매어, 때 묻은 믿음을 그대로 고집하는 것을 신앙의 지조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을 보면 딱하다. 우리는 ‘말씀’과 신앙 양심 앞에 좀 더 수그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영수―그가 단상에 서면, 전에 누구도 입 밖에 낸 적이 없는 오묘한 진리가 터져 나와, 여호와의 깊은 사정과 구원의 원리가 소상히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손길에는 희한한 권능이 임하여, 닿기만 하면 악령의 세력이 무너져 나가는 것을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다. 왜 하필 그에게 이런 큰 권능이 임하는 것일까? 그것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것이다.(슥4:6)

일찍이 ‘나는 왜 이렇게 총명한가!’ 하고 자기 자신에게 반해 버린 철인(哲人)이 있었다. 그는 바로 ‘신은 죽었다.’는 폭탄선언으로도 유명한 니체이며,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가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다. 신은 특히 당신의 사람을 통하여 시퍼렇게 살아서 움직이는데―그도 하늘의 것을 헤아리는 ‘총명’은 갖지 못하였다.

인간 이영수는 별로 배우지 못했다. 젊은 나이(33세)에 세상에서 밟힐 대로 밟히면서, 이 세대의 온갖 고초를 골고루 치렀다.―막노동, 일용품 행상, 정당의 사환(使喚), 그리고 연예계에까지 발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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